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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재앙:최악의 아포칼립스 01.

질병 '대재앙(Apocalypse)'와 함께 찾아온 인류 멸종의 순간




"인간은 신이 저지른 실수에 불과한가? 아니면 신이야말로 인간이 저지른 실수에 불과한가?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Nietzsche)"





인간은 고향을 잃었다. 태초에 인간이 잉태되었을 때-그러니까, 맨발을 간질이는 풀잎들의 감촉이 전혀 어색하지 않던 푸르던 날 그 어딘가에-, 그때부터 자연은 언제나 인간의 편이었다. 인간에게 있어 한없이 관대했고 무엇이든 내주었으며, 마치 자식을 둔 부모가 그를 사랑하듯 인간을 사랑했다.


애석한 일이지만, 인간과 자연을 정다운 가족의 모습으로 그려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인간은 이기적이고 은혜를 모르는 동물이었다. 자신의 수지가 맞는 한에서 자연을 보호했고, 착취하고 개발하는 것이 저들에게 주어진 권리라 여겼으며, 삭막한 회색빛 세상은 낡아빠진 텔레비전 어딘가에 나오는 심야 영화 속 머나먼 미래라고 착각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무력의 힘을 빌려 제멋대로 세상을 다듬어 나가거나 대규모 살상 무기들을 자랑스레 늘어놓고서 지구가 제 손아귀에 있다는 듯 굴 수 있을리가 없었다. 동그란,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보이저 1호가 찍은 지구의 사진을 부르는 명칭, 칼 세이건)의 지구는 이제 기억 너머 속 희미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오직 인간에 의해서.




발원지 미상의 급성 열성 전염병. 통칭 <대재앙>. 이유를 알 수 없는 질병이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가늠할 시간조차 없이, 고작 이주라는 짧은 시간 동안 수십만의 목숨을 앗아간 <대재앙>은 한때 유럽의 인구 중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백성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던 흑사병을 상기시킬 만큼 지독히도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사람들이 북적이던 도시를 채운 것은 오직 무성히 자란 잡초들과 이제는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어버린 시체들이었고, 감염 경로조차 알려지지 않은 질환이 두려워 떠는 이들의 비명소리만이 들썩였다. 세계 각국에서 약간의 시간 차이만을 가진 채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한 병은 당국에서 손을 쓸 도리조차 없이 널리 퍼져나가, 이제는 국가 차원에서 대규모의 병력을 움직이지 않으면 전혀 통제가 되지 않는 상황까지 넘어와 버렸다. 먼지와 모래, 무수히 많은 쓰레기들이 나뒹구는, 한때는 화려한 불빛들이 즐비했떤 도시의 거리에는 주인을 잃은 반려 동물들과 그들의 가족들이었으리라 추측되는 사람의 시체만이 가득했다.


이는 비단 인구의 밀도가 높은 도시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직 감염 경로조차 파악하지 못한 이 질병은 군 병력을 동원한 격리와 소독에도 불구하고 벌써 교외와 시골을 비롯한 국가 곳곳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시골의 모습은 이미 황폐해진 도시와 다름없이 아수라장이었다. 사육장을 뛰쳐나온 동물들이 길거리에서 뛰어다니고 있었고, 사람의 손길을 거치지 않아 수확시기를 지난 작물들이 다가오는 추위에 꺾여 맥없이 쓰러져 있었다. 산을 가득 채운 소나무들만이 재앙과 겨울의 도래를 눈치채지 못하고서 고요한 바람을 타고 흔들렸다. 소름끼치게 조용하고도 고독한 종말의 모습이었다.




"아아, 여기는 섹션 알파. 여기는 섹션 알파. 파악된 인원 모두 격리구역-A로 이송하겠다. 본부 지시 바란다."

"여기는 본부, 허가한다. 격리구역-A, 지금 오픈하겠다. 이상이 생기면 보고하라."




내가 항체를 가진 사람일지, 아니면 그저 아직까지 재수가 좋아 살아있을 뿐인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정부의 방침에 따라 바로 격리가 되었기에 지인들의 생사도 짐작할 수 없었다.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는 살아도 그것대로 지옥이었겠지만, <대재앙>에 감염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해볼 때면 등골이 오싹해졌다. <대재앙>에 감염된 이들이 어떻게 죽어가는지,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 이 두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에 더욱 그리 믿고 싶지 않았다. 그저 어디선가 살아서 격리되어 있다고 믿는 수 밖에.




"오, 신이시여! 인류에게 천벌을, 벌을 내리소서!"

"엄마, 엄마..."




그들이 말하는 격리구역-A로 이송되는 동안에 아직 이 혼잡한 상황속에서 격리되지 못한 상태로 거리를 돌아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을 마주칠 수 있었다. 인간이 신의 섭리를 어겼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며,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회개하라고 소리를 치면서 도시를 활보하던 사이비 종교 단체-아마 곧 감염되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이미 싸늘하게 식은 부모를 끌어안고 죽음이라는 거대한 어둠을 깨닫지 못한 아이, 연인 혹은 가족을 잃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려는 사람 까지. 하루아침에 운명이 뒤바뀐 사람이 수십이었고, 혼란스러운 틈을 타 살인이나 강도 따위의 범죄도 들끓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는 터무니없는 이유를 가져다 대며 죽음을 목전에 둔 인간 특유의 잔혹함과 이기심이 이러저리 날뛰고 있었다.


격리되기 전 내가 있었던 곳은 국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는데, 도시에 비하면 처음부터 한참이나 조용한 곳이었지만, 나는 그처럼 적막에 휩싸인 마을을 일전에는 본 적이 없었다. 최근 나를 괴롭히던 복잡한 일들이 있어 생각을 비우려는 심산으로 두어달 내려가 있으려던 계획이었다. 그러나 <대재앙>은 한적한 시골마을에까지 그 마수를 미쳤고,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도시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군인들에 의해 강제로 이송되었던 일을 두고 '돌아왔다'고 표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도시에 돌아오고 나서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당연히 겁에 질린 사람들과 이유없이 화를 내는 사람들, 정신을 놓은 양 울어대는 사람들 등, 갑작스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이었다. 한동안 시골에 내려가 있었기 때문인지, 나는 그 순간들이 너무나 시끄럽게 느껴졌다. 어떠한 종류의 안타까움이나 동정심보다도 마치 자연의 침묵에 낀 눈치 없는 잠음과 같았던 그들이 그저 불편하기만 했다. 

나는 그 순간 내가 떠나온 시골 마을을 회상했다. 마을 주민들이 모두 죽어 그저 지독히 조용하기만 했던 마을.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의 소리만이 해변가를 울리는, 이따금 소와 돼지들의 느릿한 걸음걸이들이 느껴지던, 바닷가 마을. 해변에 몰아치는 파도의 소리와 그 위에서 반짝이며 빛나는 모래사장의 부드러운 촉감, 뒤로는 푸른 숲과 앞으로는 찬란한 바다가 펼쳐진, 강렬한 햇살에 눈이 시렸던 그곳. 분명 무섭거나 초조했어야 했을 그 순간이, 기이하게도 내게는 어떠한 종류의 아름다름으로 다가왔다. 인간의 소리와 그들이 만들어 내는 소음이 모두 죽어 온전해진 자연을 본 사람이 또 있을까? 나 또한 감염되어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형체없는 공포보다도 인간이 짓밟은 자연이 뒤늦게 울고 있는 소리를 먼저 떠올렸던 그 순간에, 내가 느꼈던 어떠한 종류의 황홀감을 이해할 사람이 또 있을까?




"베드로 박사님?"

"그쪽은..."

"크리스입니다. 일전에 박사님이 계시던 연구소 근처의 대학에 다녔던..."

"그럼 그땐 학생이었겠군요."

"예에, 그렇죠. 종종 박사님의 강연을 듣곤 했습니다."




그들이 격리구역-A라고 칭하는 곳에 도착한 직후, 그는 제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는 크리스의 얼굴이 낯설었다. 대학이라. 연구소 근처에 위치했던 국립 대학이라면 몇 번 강연을 열었던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큰 인상을 남길 만큼 장대한 이야기를 하고 온 것은 아니었을 뿐더러 화려한 연구 실적에 비해 제 강의는 지루하고 따분하기로 유명했고, 강의를 수강하던 학생들 중에서는 그를 수강하면 얻을 수 있는 혜택을 누리기 위해 그저 신청만 해두고서 건성으로 듣는 이들도 많았다. 자신을 기억하고 이런 상황에서 인사를 할 정도라면 맨 앞줄에 앉아 열성적으로 메모를 하며 듣던 학생 정도일 터다.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적당히 기억이 난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고는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의외네요. 박사님이라면 분명 연구소에 계실줄 알았어요."

"연구소요?"

"예. 세계 곳곳의 저명한 전문가들을 불러모아 <대재앙>을 이길 대책을 마련하고 있는 모양이더라고요. 제가 아는 다른 교수님도 얼마전 그곳으로 불려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가요. 그들이 저를 찾을지는 의문입니다만, 애초에 감염자로 의심받고 있으니 다들 이렇게 격리되어 있는 게 아닙니까."




자신을 크리스라고 설명하는 남자는 자연스레 제 옆자리에 걸쳐 앉았다. 격리되어 있는 동안 마냥 멍청히 있을 수 만은 없었기 떄문에 어떻게 해서든 상황을 이해하고 마땅한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혼자서 생각할 청각적인 여유가 필요했으나, 곁에 앉은 크리스는 어떻게 그렇게나 넉살이 좋은지-칭찬이 아니라 역설이다-계속해서 말을 붙여왔다. 전반적으로 침울한 분위기의 다른 격리자들과는 다르게 어딘가 상기되어 있는 그의 모습은 언뜻 지나가는 사람이 스쳐보더라도 이상하다고 짐작할만해 보였다.


가벼운 근황을 묻는 듯 보였던 그는 어느새 자신의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끌어내다가, 곧이어 이번 질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기 시작했다. 묘하게 캐물어오는 크리스의 태도가 수상쩍었기 때문에 말없이 미간을 찌푸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크리스는 내가 자신을 의심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권위있는 전문가 특유의 오만함 정도로 여기는 것 같았다.


크리스는 아주 잠깐의 침묵을 유지했다. 물론 그는 곧이어 깨졌지만, 나는 솔직히 크리스와의 짤막한 대화들을 통해 시골 마을에 있던 터라 알 수 없었던 단편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내가 있던 그곳이 도시와 아예 단절되었던 건 아니었지만, 도시에서 수십, 수백명의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동안에도 그곳은 안전했기에, 나는 딱히 <대재앙>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나의 문제에 집중하기에 바빴었다. 마을에 병이 빠르게 퍼진 뒤에서야 뉴스에서 하루종일 떠들어대던 이유를 감지할 수 있었지만, 그때 무언가 알아보려고 시도하기에는 너무 늦은 뒤였다. 소독을 목적으로 마을을 둘러보던 군인들에게 발각되어 나는 바로 이곳으로 격리되었다.


현재까지 내가 홀로 알 수 있는 정보는, 오직 그 마을에서 일어났던 죽음들의 공통점을 근거로 끼워맞춘 구색에 불과했다. 애초에 큰 병원도 없는 마을이었을 뿐더러 동네에 하나뿐이던 병원의 의사는 이미 머리가 새하얀 노인이었고, 감기나 디스크와 관련된 간단한 진료밖에 하지 못했기에 갑작스레 다가온 질병에 대한 지식은 커녕 대처 방안 조차 알아내지 못했다. 그 마을에서 관련된 내용에 있어 가장 박식한 사람은 저였으리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좁은 연구실에서 천문학적 금액의 기계 장치들과 몸 굵기만한 서류더미들을 쌓아두고 그럴싸한 실험을 진행하는 것이었지, 결코 사람을 살려내는 실전은 아니었다. 나는 내 머릿속을 뒤져 최대한 어떠한 대책을 강구하려 노력했지만 <대재앙>은 무서운 속도로 마을을 잠식했고, 사람들의 비명과 통곡소리도 곧이어 질병에 파묻히고 말았다.


차라리 크리스에게 이야기했던 것처럼 자신이 격리당할 입장만 아니라면, 무언가 연구라도 해볼 기회가 있을지도 몰랐다. 모태신앙이었으나 신을 믿는 것은 아니었기에, 신이 내린 벌이라는 세간의 뜬소문들에 동의할 마음은 없었다. 모든 일들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여러가지 의문들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연구소로 저명한 학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크리스는 말했다. 그러나 잠복기간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턱대고 전문가라는 이유 하나만을 믿고서 사람들을 수도에 끌어들이는 게 정녕 현실성 있는 이야기일까? 국가급의 재난 사태였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해결 방안을 찾으려 혈안이 되어있는 국가의 상태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크리스의 이야기는 모순 투성이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책이라도 챙겨올 걸 그랬나봐요."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책을 읽을 여유는 있나보군요."




크리스와 태연한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지만, 크리스도, 그리고 자신도, 지금 저들에게 닥친 상황이 단순한 장난이 아님은 알고 있었다. 격리구역이라고 그럴싸한 이름까지 붙여서 데려온 곳은 결국 도시 곳곳에 뻗어있는 지하철 역이었고, 더럽거나 불빛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당장의 먹을 것 조차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다. 언제까지 멍청히 이 지하철 역에 있어야할지도 알 수 없었고, 수도의 중앙에 위치한 연구소에 모여있다는 대단하신 과학자들께서 어디까지 연구를 진행했을지, 설득력 있는 결과물을 내놓았는지도 몰랐다. 이대로 가다간 감염 여부에 대해서는 확인도 못하고 굶어죽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나는 시골 마을에 칩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연히 군인들에게 발견되어 이곳에 도착했으므로, 원래부터 격리되어 있던 사람들에 비해서는 한참이나 늦게 격리된 셈이었다. 내가 오기 전까지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군인들이 무어라고 사람들을 설득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그 전에도 마땅한 식량 하나 내어 주지 않은 것은 확실해보였다. 이미 수도는 물론이고 정부도 마비되어 일일이 식량을 보급하는 데에 신경을 쓸 수 없어 단순히 누락되었거나, 식량을 보급해줄 정도로 여유있는 물자가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쪽이 마음은 편했으나, 아무래도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동안 사람들을 방치하고 있었다.


뭐가 어찌 되었든, 이곳에서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었다. 관련된 정보가 조금이라도 있다면-젠장, 처음으로 시골에 내려간 선택이 후회되기 시작했다!-가장 합리적인 판단을 통해 그럴듯한 결론을 추려낼 수 있었을 텐데, 아는 것이라곤 영문모를 질병에 인류의 대부분이 죽어나가고 있다는 추상적인 정황과 옆에 앉은 크리스라는 이름의-이것이 본명인지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남자가 주절대는 신뢰성 없는 이야기들 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평소라면 질색을 하던 추리소설의 상상력을 빌리는 수 밖에 없었다. 자신있게 읽어보이던 수십개의 논문들도 이런 상황에서는 도움이 없는 듯 했다. 영화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다.




"저희는 여기서 죽게 될까요?"

"두려우십니까?"

"저는 아직 젊으니까요."

"그렇군요."

"박사님 가족은 어디... 아, 이런건 실례인가."

"알면 묻지 않는 게 예의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계속해서 새로운 주제를 찾아내어-물론 그중 달가운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정말 하나도.-말을 붙여오는 크리스의 행위에 슬슬 질려 있었다. 네, 그렇군요, 그렇습니까, 정도의 대답이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최고의 표현이었다. 현재 제게 닥쳐온 상황과 정황따위를 정리하고 머릿속을 깔끔하게 정돈하려했으나 분명 주위에서 달변가라고 불렸을 그의 화술덕에 그마저도 불가능해졌다.




"전 가족이 죽었어요."




이전까지와 전혀 다름없는 명랑한 목소리로, 마치 '오늘 하늘은 푸르네요' 나 '아마 오후에는 비가 오지 않을까요' 같은 대사를 이야기하듯 아무런 의미도, 감정도 담지 않고서, 크리스는 이야기했다. 나는 그제서야 줄곧 바닥에 처박아두던 시선을 끌어올려 그를 마주했다. 크리스의 목소리는 여전히 태연했으나 표정은 사뭇 달라져 있었다. 의문스러운 얼굴. 나는 크리스가 무척이나 가벼운 사람이라고 적당히 짐작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 평가를 철회할 필요가 있어보였다. 그는 속을 짐작할 수 없는 사람이다. 대화를 이어나갈 떄마다 느끼는 석연찮은 구석이며 묘한 분위기 따위가 크리스를 더욱 이질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가족이 죽었다, 고 이야기하는 크리스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도 의미도 실려있지 않았으나 팔십먹은 노인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 허심탄회하게 내뱉는 말이나, 죽음에 대해 짐작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이 속삭이는 말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그를 한참이나 뚫어지게 쳐다보자, 크리스는 그제서야 한번 웃고는-나는 주춤했다-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주 옛날에요. 살해당했죠. 운이 나빴죠. 사고였어요. 아니, 어쩌면 원래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결말일지도 모르겠네요. 위험한 일을 하셨거든요. 그때는 먼저 간게 원망스럽기만 했는데, 지금 상황을 보니 차라리 그때 돌아가신 게 다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

"여동생이 하나 있긴 하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로는 연락이 끊어졌어요. 제가 수도에 생활하면서부터 소식을 전해듣기 어렵기는 했지만, 그 사고를 계기로 영영 종적을 감춰버렸죠."

"...대체 왜 제게 이런 이야기까지 하는 겁니까?"

"말했잖아요. 죽는 게 두려우니까죠."

"그게 무슨..."




아까보다 장난기 서린 표정을 짓고 있는 크리스를 바라보면서, 나는 그제서야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에 느꼈던 인상보다 한참이나 앳되어 보였고, 자신의 생각이 맞다면, 일전에 추측한 강의실의 학생은 아닌듯 했다. 그 학생은 시력이 무척이나 나빠서 자신보다도 두꺼운 안경을 끼곤 했고 강단 위에 서서 그를 내려다 볼 떄면 두툼한 안경알 너머로 굴곡진 눈의 모양이 종종 시선을 끌곤 했다. 그러나 크리스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안경을 끼지 않았을 뿐더러 시력에 문제가 있어 보이지도 않았따. 으레 그만큼이나 두꺼운 안경을 끼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콧등에 눌린 상처가 있거나 안경이 없을 때에도 무언가를 응시할 때면 습관적으로 인상을 쓰기 마련이다. 흐릿하게 보이는 형체에 집중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행위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크리스에게는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수더분한 머리를 깔끔히 넘기고, 늘상 굽히고 다녔던 어깨를 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똑같은 사람이라고 보기에 크리스의 콧등은 말끔하다 못해 상처 하나 없었고, 미간을 찌푸리기는 커녕 눈가의 주름 한 점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바라보는 두 눈의 초점이 또렷했다. 역의 불빛에 의존하여 그의 눈을 응시했을 때 나는 직감적으로 그가 렌즈같은 보조물을 착용하지도 않았음을 알았다. 크리스는 대체 누구인가? 왜 내게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거지?




"...이런 주제는 그만하죠."

"마음에 안드시나 보네요."

"무거운 이야기를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의 미소와 의문스러운 표정에서, 점점 알 수 없는 기묘한 감각을 느끼는 것이 싫어 다시 고개를 돌렸다. 크리스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투덜댔지만, 어디까지나 그것 또한 완전한 진심은 아니리라 막연히 추측했다. 딱히 그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딱히 믿을만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사람들과 사교성 좋게 어울리는 성격은 아닐지라도 누군가에게 함부로 척을 지고 다니지는 않았다. 전문 분야에서 드러났던 뛰어난 연구의 성과만을 빼면 지루하다고 해도 무방할 만큼 평범하고 따분한 일상을 영위했으며, 일생 최고의 일탈이라고 할 수 있는 시골 마을에서의 칩거 또한 조용하게 이루어졌었고, 당연한 말이지만 그 과정에서 누구와의 마찰도 없었다.


믿고 싶지 않지만 나는 아무래도 크리스를 의심하고 있는 것 같다. 자신보다도 한참은 어려보이는, 초면의 사람을 상대로 어떠한 종류의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불쾌함이 뒤따르는 일이었으나, 원초적인 감각에 의존해 그를 경계할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계속해서 시선을 피하려는 나의 노력이 무색하리만큼 처음부터 줄곧 지금까지 자신만을 응시하는 커다란 녹빛의 두 눈을 바라볼 때면 어디론가 빨려들어가는 느낌까지 들었다. 그와 나는 정말 이곳에서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 맞을까? 터무니없는 생각이 연이어 들기 시작했고, 나는 어쩌면 그와 일전에 만난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냈다. 그렇다면 어디에? 물론 그 질문에까지 대답하지는 못했다.


크리스...

그의 이름을 되뇌어 보았지만 역시나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선명한 녹색의 눈동자를 가진, 의문스러운 표정의 청년이라면 스쳐지나가다가도 불현듯 시선을 잡아끌만한 이가 분명하건만, 총명하다고 자부해도 좋을 머리는 명쾌한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박사님."

"..."

"베드로 박사님."

"...왜그러시죠."

"제가 의심스러우세요?"

"네?"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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